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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는 역사

광복 그날의 희열, 광복절에 대해

by 놀러와이 202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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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절이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우리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를 장악하고 우리 민족을 잔인하게 탄압하였습니다.

1945년 이러한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또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집에 국기를 달아 경축하고 있습니다.

 

2. 전개

2차 세계대전(1941-1945) 독일군의 항복 이후에도 태평양 전선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19458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며 8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결국 814일에 일본은 포츠담 조약에서 연합국들이 결정한 의사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습니다.

194599일 서울의 옛 일본 정부 청사에서 미군들이 일장기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945818일 낮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한국광복군은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협박에 굴복하여 다음 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 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하면서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 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남한은 미군 북한은 소련으로 19459월 한반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한편 남한에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하던 김구와 함께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여전히 한국은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3. 광복절 관련 영화 추천  '암살'

광복절에 보면 가장 좋을 영화로 추천합니다.

암살은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이 나옵니다.

각각의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며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들이 얼마나 독립을 갈망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일 인상에 남았던 것은 극 초중반에 완전히 믿었던 염석진의 배신입니다.

독립운동 하다가 붙잡혀 사형당하기 직전에 들어온 밀정 제의에 살고 싶어서 그 제의를 수락했던 것도,

마지막 대사에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라는 것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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