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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는 역사

연평해전을 기억하며

by 놀러와이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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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연평해전

6.25 전쟁 이후로 오랫동안 갈등상태였던 한국 북한은

1998년 초 대북화해협력정책이 추진되면서 그 관계 개선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금강산 관광을 통해 북한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게 되죠

하지만 19986월 북방한계선에서 북한 잠수정이 어업용 그물에 걸리고 그 안에 있던 9명의 북한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북한과 관계가 악화하는 걸 원치 않았던 한국 정부는 무난하게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불과 다음 달에 강원도 근처에서 남한 침투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간첩의 시신이 발견되며 지금까지 믿어왔던 평화가 허상이었다는 게 확실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합과 평화를 위해 노력해도 북한은 정권 유지밖에 관심이 없고

대남도발을 이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북한 측은 남한 측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발뺌하고 심지어 북한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11월에는 강화도 해안에 간첩선이 상륙을 시도 하다가 우리 군에 걸려들자 도주,

12월에는 여수 앞바다에 반잠수정이 침투 시도 했다가

육해공군의 합동 작전으로 격침당합니다

심지어 이때는 금강산 관광 한창 진행 중이었고 우리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이중적인 북한의

태도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제 남북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요

이로써 1999년부터 다시금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다가

꽃게잡이 철인 북한 어선들이 대규모로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조업을 시작합니다

북한해군이 이들을 감시하러 오게 되는데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의 군함들도

북한군을 견제하기 위해 이곳으로 머물며 양측이 대치합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선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1953년 설정된 북방한계선을 북한은 꾸준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북한 선원들이

탈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꽃게잡이 철엔 북한군 활동이 많아집니다

19996월 남북 관계 긴장감이 높아지며 북한군이 한국 영해로 넘어와

국군에게 도발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고

북방한계선에 대한 불만을 점차 강하게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워치콘 2를 발령하여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습니다

 

1999615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

해전이 터집니다

사건은 북한 해군 함정들이 한국 영해로 넘어오고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한국 해군 군함 10여척이 충돌을 감행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양측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정도였습니다

이때 충돌을 한 북한군 청진급 경비정이 25mm 기관포 사격을

통해 첫 포문을 열고 주변에 있던 북한군도 연달아 사격을 시작합니다

양측 교전이 시작 가장 먼저 공격에 노출된 참수리 325호는

20mm 발칸포로 즉각 대응 사격했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도발로 한국군을 간 보고 있던 북한군은

혹독한 대가 치르게 됩니다

한국 군함과 달리 오픈카처럼 훤히 함교가 노출된 북한군 군함이 그 자리에서

갈려 나간 것입니다. 심지어 참수리보다 더 강력한 펀치를 가진

포항급 초계함도 76mm 함포를 동원해 화력을 쏟아붓고

북한군 어뢰정 한척과 경비정 한척을 단숨에 격침합니다

북쪽으로 후퇴한 나머지 3척 역시 겨우 침몰 면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군은 참수리급 고속정 2척이 파손되고

7명의 장병이 피해를 당하게 되고

북측 역시 2척의 군함을 잃고 최소 20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건을 제1연평해전이라 불렸고 사실상 대한민국 해군의

완벽한 승리로 종결됩니다

7명의 장병이 1계급 특진을 누리고 북한군이 쏜 총탄에 얼굴과 목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위치를 사수하며 북한군을 맞선 안지영 대위는 을지 무공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먼저 도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한국을

맹비난하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북한군은 연평해전을 담당한 수뇌부를 교체하고 한국해군의

전수를 연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한편 북한은 연평해전을 통해 자신들의 화력이 국군보다

매우 약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T-34 전차의 85mm 전차포를

떼어내어 해군 함정에 부착하고 60mm 박격포 그리고 저격수까지 함선에 태우고

한국 해군의 충돌전수를 대비해 장갑을 보강합니다

2. 제 2 연평해전

2002629일 대한민국 전체가 월드컵 4강 진출의 감동에 젖어 축제 분위기 빠져

있을 때 이 순간을 노려 북한은 다시 한번 2차 연평해전을 일으킵니다

두 척의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고 이전과 같이

우리 해군의 고속정에 대응하며 시작합니다

잠시 추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북한 함정이 갑작스럽게 속도를 줄이면서

그 뒤를 쫓던 한국해군 참수리 357호 측면이 노출됩니다

바로 그 순간 북한군 경비정에 탑재되어 있던

85mm 주포가 발사됩니다 ,

동시에 강력한 충격이 참수리 357호에 가했습니다

함장이었던 윤영하 소령은 곧바로 대응 사격을 명령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북측의 포화에 노출된 참수리 357호는

결국 전기공급과 엔진이 멈추고 바다 위에

표류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와 더불어 윤영하 소령까지 얼마 못 가 북한군의 저격에 전사합니다

그래도 부함장이었던 이희완 중의가 37mm

대공포탄에 부상을 당한상태로 지휘권을 행사하며 전투 이어 나갑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수동으로 20mm 발칸포를 조작해야 했고

대부분의 장병이 부상을 당한 상태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사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나마 근처에 있던 참수리358호가 합세하여

함께 공격했지만 집요하게 357호에 집중 사격을 합니다

심지어 1차 연평해전 이후 서북 도서 일대에 대한 미사일을

배치한 탓에 후방에 있던 한국군 초계함들이 접근하는 것도 힘든 사정이었습니다

결국 이에 따라 참수리357호는 침몰합니다

승조원들이 배수 작업을 하는 한편

이후 현장에 도착한 군함들이 어떻게든 예인을 해보려 했지만

이미 북한군의 공격으로 좌현에 300개가 넘는 구멍이 뚫려있어

배를 포기하게 됩니다

또한 북쪽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는 것은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불가능했습니다

이처럼 2차 연평해전에서 한국군이 치명적인 기습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북측이 1차 연평해전의 복수를 위해 오랫동안

철저하게 계획한 작전이기 때문입니다

2차 연평해전 이후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방면으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3. 연평해전

연평해전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개인사를 보여주며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2002년 터키와 대한민국 34위전 경기가 열린 제2연평해전을 배경으로

영화는 마지막에 실제 장병들의 합동 영결식 장면과 남겨진 가족들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많은 슬픔을 자아냅니다. 한번 시청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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