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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는 역사

1026사태에 대해, 아직도 논란 중인 이유

by 놀러와이 2023.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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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6사태란

19791026일 저녁 6시 궁정동안가에서

김재규는 그날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차례대로 총격을 가해 살해 한 사건으로

대한민국 유일하게 현직 대통령이 피살된 사건입니다.

 

2. 10.26원인 및 결과

1961년 박정희 장군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이루어지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쳐서 나라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어 가는데

정권은 독재 정치 밀고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면서 국민의 불만은 점점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10.26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미국의 존재

1026사건의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의 존재인데

박정희 유신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미국이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공공연하게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게 됩니다

이런 한국과 미국의 긴장감이 연연한 가운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박정희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직접 증언을 하고 다니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압력과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당시 대한민국의 정세

1979년 당시 혼란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

YH 노동자 농성 사건, 당시 김영삼 시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사건

유신을 반대하는 대규모 부마사태

(1979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

등으로 정치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박정희의 정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3. 김재규 박정희의 해결 방식의 차이

이 같은 국면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김재규와 박정희는 

문제 해결 방식에서 입장 차이가 극명하였습니다 

박정희 차지철은 강경책

김재규는 온건책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자고 주장하였습니다

 

- 1026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주장

김재규는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역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통치 스타일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 건

삼선개헌으로 71년에 7대 대통령이 될 때부터라고 진술하였습니다.

72년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고

74년 긴급조치가 실시 되는 등 온 나라가 살얼음판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장관으로 임명된 김재규는 또 다시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026사태 이전 김재규의 행적을 되짚어 보면 19794월 초(6개월 전) 삼군 총장들 궁정동으로 초대하였는데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이때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보고

여의찮으면 거사를 벌이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1026사태의 결과

군사재판으로 진행된 1026사건

1980128일 사형선고가 내려집니다

사형선고한 지 4일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이례적인 유일한 사건입니다

판결에 참여한 판사 총13명 중

소수의견을 낸 6명의 판사들은 

불성립 저항권을 내세우며

국민은 국민의 기본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민주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정부에 대해 실정법상의 의무 이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6명의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대법원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로 김재규에 사형선고를 하고

소수 의견을 낸 판사 6명은 3개월 후 모두 법복을 벗게 됩니다

재판은 이렇게 속전속결로 마무리 됐고 판결 4일만에 김재규와 일행 처형됩니다.

 

- 김재규의 행위에 대한 논란

지금까지도 1026사태가 구국을 위한 건지 개인적인 우발사건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결론은 1026사태는 김재규의 개인적인 결함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를 발표하였는데 박정희가 김재규의 위법 행위에 대한

경고 친서를 보냈다는 것

중앙정보부장 자리가 위태로워서 대통령을 쐈다고 신문에 보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김재규의 주장은 김재규 자신은 그 같은 강경과 억압정책을 박정희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로인한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최후의 수단을 쓸수 밖에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거사였다 구국을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김재규가 차지철을 먼저 쏜 것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 우발적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차 실장을 먼저 쏜 것이 개인적인 증오 때문이다

- 계획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서 경호실장을 먼저 죽이는 게 당연한 순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남산의 부장들

이 영화는 1026사태가 있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둘러싼 영화입니다.

남산의 부장들이란 대한민국 이인자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장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 당시 이인자라고 칭하는 인물들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전개가 되는데요

위에서 제가 언급했다시피 당시 미국 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이인자들의 대립이 나오면서 각 인물들의 감정선이 잘 전달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다 연기파 배우로 연기 구멍이 하나도 없어서

보는데 더 생생한 전달 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장면에 각하를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합니다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소름이 쫙 돋습니다 한번 시청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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